유칼립투스 스피커·흑단 턴테이블…나무가 창조한 '위대한 소리'

입력 2024-03-14 18:54   수정 2024-03-15 03:14


쇼팽의 녹턴, 그리고 24개 프렐류드가 다시 태어났다. 피아니스트 알리스 사라 오트와 일렉트로닉 뮤지션 올라퓌르 아르날즈가 함께한 쇼팽 프로젝트에서다. 아르날즈의 고향 아이슬란드의 어느 콘서트홀에서 자유롭게 녹음된 쇼팽 프로젝트는 재편집과 독창적 믹싱으로 쇼팽 음악에 새로운 영혼을 불어넣었다.

천재적인 레코딩 아이디어보다 더 눈에 띄는 장면이 있었다. 그들과 함께한 현악 사중주 멤버 중 마리 사무엘센의 바이올린 소리. 한 번 들은 이후론 새벽녘에도 그 소리가 사그라들지 않고 귓전을 맴돌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바이올린은 스트라디바리! 그중에서도 1700년대 초반 제작된 빌레모트 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이었다. 영국에 있는 세계적인 바이올린 수리·복원회사 플로리안 레온하드 파인 바이올린스에서 흔쾌히 빌려준 이 귀중한 악기는 쇼팽 프로젝트에서 가장 뜨겁게 타올랐다.


스트라디바리의 소리는 어떤 값비싼 현대 바이올린도 흉내 낼 수 없는 공명을 일으킨다. 왜 그럴까. 많은 학자와 나무 전문가들은 나무에서 그 답을 찾는다. 네덜란드의 어느 대학 연구진은 CT 촬영 자료를 바탕으로 균일하면서도 높은 밀도를 확인했다. 미국 텍사스 농공대의 한 박사는 목재에 포함된 화학물질을 그 원인으로 지목하기도 했고, 테네시대 나이테 전문가는 당시의 기후 영향을 추론했다. 이것이 정확한 결론인지는 확신하기 힘들다. 하지만 인공적으로 만들어내기 힘든 자연의 힘이 특별한 소리로 귀결된 것만은 분명하다.

나무는 악기뿐 아니라 오디오 관련 기기에서도 빛을 발한다. 현대 하이엔드로 오면서 진동을 억제하기 위해 알루미늄, 카본 등 다양한 소재를 스피커의 몸체로 사용하고 있지만 여전히 목재가 대세다. 스피커로 가면 그 종류도 다양하다. MDF, HDF를 넘어 자작나무나 아프리카 흑단도 활용된다. 코알라의 주식으로 알려진 유칼립투스로 표면을 마감한 것도 있다.


아날로그 장비 쪽으로 가면 카트리지(턴테이블 위 바늘 움직임을 전기 신호로 바꿔주는 부품) 보디에 목재를 사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일본의 데논에서 만든, MC카트리지의 표준이라 불리는 ‘DL-103’ 모델을 사용한 적이 있다. 하지만 평탄한 사운드에 이내 질려버렸다. 그때 신박한 아이디어를 알게 됐다. 싸구려 플라스틱 케이스를 걷어내고 아프리카에서 자란 나무를 가공해 만든 ‘음핑고(흑단나무) 보디’를 씌우는 것이다. 다부진 만듦새와 온기가 느껴지는 음핑고 보디의 촉감과 색감은 소리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최근 출시 50주년을 맞이한 영국의 대표적인 턴테이블 ‘린 LP12’, 일명 ‘손덱’은 유난히 플린스(턴테이블을 받치는 보디)가 돋보인다. 알고 보니 너도밤나무를 고압으로 압착했다고. 묵직한 무게에 짙은 색상은 대대로 이어져온 명품 같은 느낌을 준다. 50주년 기념작의 디자이너는 애플 디자이너였던 조니 아이브였다.


노팅엄 아날로그의 아나 로그(Anna Log) 턴테이블도 독특해서 기억에 남는다. 플린스는 마치 가문 대대로 내려온 가보 같은데, 무려 250년 전 캐나다에서 수입한 자작나무 고목이 원재료다. 이를 25㎜ 두께로 자른 후 수십 겹 다시 붙였다고. 오랜 세월을 견딘 나무 자체의 잔향은 공진을 극대화한다. 이탈리아 소너스 파베르도 그렇다. 과르네리, 스트라디바리 등 악기의 이름을 딴 소너스 파베르의 스피커는 악기의 보디를 연상시키는 독보적인 짜맞춤 공법을 쓴 캐비닛 덕에 독특하고 아름다운 음색을 만들어낸다.

혹시 건축 디자이너가 만든 스피커를 알고 계시는지. 이 시대 최고의 건축 디자이너 장 누벨이 스피커에 사용한 소재는 카본도 알루미늄도 아닌 547겹의 나무였다. 장 누벨의 천재적인 창작력과 독보적인 디자인, 사운드 엔지니어 마이클 들럭의 감각이 만나 ‘필하모니아 스피커’가 탄생했다.

나무는 여전히 숨 쉰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그 특성이 조금씩 변하며 그 시대에만 들을 수 있는 소리를 낸다. 인간의 시간에도 황금기와 쇠락기가 반복되는 것처럼 말이다. 스피커도 악기나 와인, 위스키처럼 몇 년산인지 표기해 놓으면 어떨까. 와인은 해마다 모두 맛이 다르고 가격도 다르다. 꼭 오래됐다고 맛이 좋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최근 것이 더 나으리란 법도 없다. 이런 자연적인 것이 가장 인간적인 맛을 내면서 인간의 음악을 더 음악답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나는 여전히 나무로 만든 오디오가 좋다.

코난 오디오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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